국내의 대표적 통신기업 KT가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경영진 교체 과정에서 회사가 외부 입김에 흔들리면서 사실상 경영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KT의 혼란상은 31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와 기타 이사를 선임하지 못함으로써 극단화됐다. 앞서 회사가 낙점한 대표이사 및 이사 후보들이 주총이 열리기 전 줄줄이 사퇴함에 따라 인사 관련 안건 자체가 상정되지 못한데 따른 결과다.

결국 KT 주총에서는 △재무제표 승인 △정관 일부 변경 △이사 보수한도 승인 △임원퇴직금 지급규정 개정 등의 안건만 다뤄졌다. 이로써 새 경영진 구성을 위한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경영 마비 현상은 최소 수개월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사 및 대표이사 후보 추천과 선임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KT를 휘감은 혼란의 원인은 주총을 앞두고 시작된 정치권의 노골적 인사 개입이었다. 단초는 지난 2일 여당 일부 국회의원들의 KT 대표 후보자 그룹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들 의원은 전·현직 임원들로만 채워진 대표 후보 면접 대상자 리스트가 공개되자 “이권 카르텔” 운운하며 KT를 맹공격했다. 20여년 전 순수 민간회사로 탈바꿈한 KT이건만, 회사를 내부의 소수 그룹이 장악한 채 이권을 나누고 있다며 시비를 걸고 나선 것이다. 마치 KT가 정부기관이라도 된다는 투였다. 이들 정치인은 한 발 더 나아가 수사기관이 KT 대표이사 등에 대한 수사에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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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박은 전방위적으로 이어졌다. 시민단체의 고발을 빌미로 검찰은 구현모 대표와 윤경림 대표 내정자를 상대로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의혹 수사를 시작했고, 1대 주주인 국민연금도 이들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드러냈다. 국민연금의 KT 대표 선임과 관련한 입장은 2, 3대 주주인 현대자동차와 신한은행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들 기업 역시 자사의 대주주인 국민연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곳들이다.

KT 대표 선임 과정에 정치권이 개입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삼척동자라도 짐작할 수 있다. 구현모 대표가 문재인 정권 때 선임됐고, 여권 관계자들이 윤경림 후보를 “구 대표의 아바타”로 지칭한 것만으로도 그 의도를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 구 대표는 지난달 마감된 KT 사장 공모에 전·현직 정무직 공무원 및 국회의원 등과 함께 지원했다가 스스로 뜻을 접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 낙점된 이가 윤경림 후보였다. 그러나 윤 내정자는 주총을 열흘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더는 버티기 힘들다며 대표이사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자신이 더 버티다가는 KT까지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이 사퇴의 변이었다.

여권이 윤경림씨의 뿌리로 보는 구현모 대표는 문재인 정권의 묵인 하에 KT 경영을 맡았다. 이후 전 정권의 인사 상당수를 낙하산으로 끌어들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방을 향해 정치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KT 입성 과정과 이후의 그 같은 행각이 여권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번 사태에서 자유롭다고 보긴 어렵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열린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주인 없는 소유 분산 기업들의 지배구조 구성 과정에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가능성을 거론했다. 이어 “절차와 방식이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취지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굳이 대통령이 나서서 할 말이었는지 되씹어볼 필요가 있다. 발언 시점으로 보더라도 이 말은 모종의 메시지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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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점은 집권 세력이 주인 없는 기업의 경영진 인선에 간섭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낙하산 투하 의도를 의심받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설사 국민연금을 앞세워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가 연금 수탁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함)를 이행하기 위함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대통령과 여당 국회의원들까지 나서서 그들 기업의 경영 상황이나 경영진 인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보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없다.

KT나 포스코 등처럼 과거 정부의 입김 아래에 있다가 완전 민영화된 기업들이 경영진 교체기마다 홍역을 치르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없어야 한다. 홍역의 직접적 원인은 당대의 집권 세력이 이들 기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일자리를 전리품 쯤으로 여기는데 있다. 기업 하나마다 자회사 등을 포함해 백여개씩의 일자리를 정치적 이해에 따라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문제라는 의미다.

스튜어드십 코드 자체도 오랜 논란에 휩싸여온 이슈다. 기관투자자의 지나친 정치화로 정작 연금 운용을 맡긴 이들의 이익과는 무관하게 작동할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 그 이유다. 그런 만큼 소유 분산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해결할 방책이 반드시 스튜어드십 코드여야 하는지도 의문스럽다. 그러한 수단을 빌미로 동원되는 낙하산 투하는 더더욱 문제 해결의 수단이 될 수 없다.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진입한데 이어 곧 탄생할지 모를 서방선진 8개국(G8)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국가다. 아직까지도 민간기업에 대한 낙하산 투하 논란이 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독점 또는 과점 체제에서 국가 기간산업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집권 세력이 이들 오너 분산 기업의 경영에 간섭하는 악습은 윤석열 정부에서 종식돼야 한다. 그들 기업의 경영에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제도로써 해결하는 게 정답이다. 제도가 미비하다면 행정과 입법을 통해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 정부와 정치권이 취해야 할 행동일 것이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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