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정치 지도자 중 감성적 소통에 능했던 인물들을 꼽으라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맨 앞자리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적어도 필자의 기억 속에서는 유권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능력에 관한 한 그를 능가할 사람은 없었다. 타고난 성품의 자연스러운 발로였는지, 습득한 기교 덕분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타인의 감성을 자극해 공명(共鳴)하도록 유도하는데 탁월했다.

군통수권자이면서도 군 장교 옆의 구석진 자리에 점퍼 차림으로 웅크리고 앉아 미군의 테러조직 수장 사살작전을 지켜본 일, 흑인 교수와 공무집행 중이던 백인 경찰 간의 언쟁이 인종 갈등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두 사람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맥주를 대접한 일 등등 관련 사례는 한 둘이 아니다.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그가 어둠에 잠긴 공항에서 미군 유해에 거수경례를 하는 장면이었다. 아마 이 모습은 세계인의 감정선을 한껏 자극하며 국가가 존재하는 진정한 이유를 되새기게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4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4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이 일이 벌어진 때는 2009년 10월 29일(현지시간)이었다. 그날 새벽 4시 무렵 어둠이 가시지 않은 미 델라웨어주의 한 공군비행장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반군 진압작전을 벌이다 전사한 미군들의 유해가 도착했다.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이들 유해를 맞기 위해 꼭두새벽에 공항에 나가 미군들과 도열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유해가 도착하고 운구병에 의해 관이 내려지자 오바마 대통령은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보냈다. 당시 외신 보도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운구 행사 이후엔 공항에 나온 유족들을 일일이 격려했다.

특기하고 싶은 점은 - 미국인들에겐 별난 일도 아닐지 모르지만 - 오바마 대통령이 진보 진영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흑인인 자신과 여성인 힐러리 클린턴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바 있는 진보 성향의 민주당 출신이다. 대선 후보 시절엔 해외파병 미군 철수를 주장하기도 했다. 복지 강화와 소수자 인권보호에 비교적 큰 관심을 기울인 점도 그가 진보 성향 소유자임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제복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데 있어서는 진영을 초월했다. 그 점을 극적으로 보여준 장면이 앞서 언급한 미군 유해 송환 행사였다.

국가의 부름에 응해 전쟁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이들에 대한 미국의 존경심 표현은 유별난 데가 있다. 곰곰 따져보면 그 같은 행동을 유별나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순국 영웅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방증하는 일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실종미군(MIA: Missing In Action)에 대한 미국 정부의 끈질긴 추적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제스처든 아니든 그런 노력이 첨단무기 이상으로 미군 전력을 강화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어느 외진 전장에서든 싸우다 산화하면 국가가 반드시 자신의 유해를 찾아 가족 품에 안겨 주리라는 믿음, 전투복 주머니 속 작은 메모 쪽지까지도 가족들에게 고이 전달해주리라는 믿음이 미군 개개인에게 강력한 애국의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달 24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8회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짧지만 강렬하고 여운이 긴 메시지를 남겼다. 4분 남짓의 연설 중 핵심을 이룬 부분은 55용사 호명(呼名)이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서해 수호 임무를 수행하다 북한군에 의해 희생된 군 장병 55명의 이름을 일일이 불렀다. 이 부분은 유가족이 아니더라도 듣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행사의 하이라이트였다. 미국의 9·11 테러 기념식에서 보았던 이른 바 ‘롤 콜(Roll Call)’을 서해의 날 기념식에서 보게 된 것이다. 호명에 앞서 윤 대통령은 산화 장병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함이라는 취지를 밝혔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육성으로 희생자의 이름을 들은 유가족들은 비로소 수년간 가슴 한가운데를 막고 있었던 울울한 감정의 덩어리가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행사 참여 유족들은 저마다 눈물을 훔치며 “감사하다”, “기쁘다”고 말했다 한다.

2020년 제 5회 기념식 때 처음 행사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다가가 천안함 폭침이 누구 소행인지 말해달라고 청했던 윤청자씨는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다”고 윤 대통령에 말했다. 윤 여사는 천안함 피격으로 사망한 고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다.

이번 서해 수호의 날 행사는 기념식이 왜 필요한지, 그 가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일깨워주었다. 진짜 중요한 건 비정상 상황이 정상으로 되돌려졌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을 수호하다 발생한 순직이 정치적 실익이 적다는 이유로 일반 참사에서의 죽음보다 푸대접받는 현실은 크게 잘못된 일이었다.

대선 후보 시절 그 먼 세월호 사고 수역 인근까지 찾아가 방명록에 “미안하다. 고맙다”는 글을 남긴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당선 뒤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을 연거푸 외면했다. 처음 참석한 때는 4월 총선을 코앞에 둔 2020년 3월의 5회 행사였다. 유족들을 더 가슴 아프게 한 건 진영 논리에 매몰돼 최소한의 이성마저 잃어버린 이들의 용사들을 향한 비아냥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올해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 전원 불참하며 희생적 순직을 여염마을에서의 일상적 죽음 대하듯 했다. 국토 방위와 애국을 보수 진영만의 가치로 착각했거나 얄팍하게 정치적 이해를 따진 결과가 아닌가 싶다. 심증이 가기론 후자 쪽일 확률이 높다. 그랬다 할지라도 우리 국민의 절반쯤인 보수 전체를 적대시하는 정당이라면 집권할 자격이 없다. 대한민국은 보수와 진보가 어우러져 작동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서해 수호 장병들의 순직은 그 어떤 죽음보다 고결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실질적 예우가 이뤄져야 한다. 여기에 더해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극진히 표현하는 감성적 의례까지 갖춰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그게 정상적이고 건강한 미래가 보장된 국가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국토 방위는 여·야나 진영을 초월하는 지고지순한 가치이자 과제다. 우리처럼 전쟁 중인 국가라면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는 말이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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