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김기영 기자] 굳건히 유지돼온 세계적 금융긴축 기조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세계 금융시장 분위기를 주도해온 미국 내에서도 전에 없이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 변화의 대표적 징조다. 금융긴축론이 힘을 잃어가기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논리적 배경엔 차이가 있지만, 한국에선 연내에 정책방향 전환(피벗)이 이뤄질 가능성을 거론하는 목소리까지 나타났다.

미국에서는 연방준비제도(연준) 위원들이 둘로 갈리어 상반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물가를 잡기 위해 연준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목소리가 전보다 줄어든 대신 긴축 속도를 더 이상 올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늘어났다. 매파로 분류되는 인사들조차 기준금리 대폭 인상 주장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대표적 매파인 제임스 불러드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는 지난해 11월만 해도 ‘충분히 제약적인’ 기준금리 영역을 거론하면서 위쪽 한도를 7%선으로 설정해 시장을 긴장시킨 바 있다. 연준의 기준금리 상단이 7%선에 닿을 가능성을 언급했던 것이다. 올해 새로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투표위원으로 가세한 닐 카시카리 미니애폴리스 연은 총재도 만만치 않게 시장을 긴장시켰던 인물이다. 그는 올해 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을 통해 연준 기준금리가 연내에 5.4%(중립금리)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사진 = 연합뉴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사진 = 연합뉴스]

이들은 지금도 금융긴축의 필요성을 앞장서서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장의 강도나 구체성은 이전에 비해 약화됐다는 인상을 주는 게 사실이다. 이들은 지금도 연준이 기준금리 추가 인상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불러드 총재는 지난주에도 금융권이 안정을 되찾고 있다며 금리의 지속 인상을 주장했다. 카시카리 총재도 지난달 금융불안 사태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연준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들이 주도하던 분위기는 이번 주 들어 바뀌는 기미를 드러냈다. 새롭게 눈길을 끈 인물은 오스탄 굴스비 시카고 연은 총재다. 블룸버그 통신 보도에 의하면 그는 11일(이하 현지시간) 공개된 시카고경제클럽 행사용 연설문에서 연준이 기준금리 추가 인상에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연준 인사가 금리동결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입에 올린 것은 굴스비 총재가 처음이라는 게 블룸버그의 전언이었다.

그가 금리 동결을 주장한 이유는 금융권 혼란상이었다. 금융권 혼란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 불확실성을 지니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굴스피 총재는 연준의 금리 인상이 지나치게 공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를 밝히는 한편 지금의 금융권 상황이 긴축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란 시각을 드러냈다. 즉, 금융권 혼란이 자연스레 긴축 효과를 내줌에 따라 통화정책의 역할이 그만큼 줄어들 수 있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이후 금융기관들은 스스로 대출 관리에 나서며 재무구조 개선에 힘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패트릭 하커 필라델피아 연은 총재도 금리정책과 관련해 신중한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하커 총재는 통화정책의 영향을 확인하려면 최대 18개월이 걸릴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면밀한 데이터 관찰을 통해 추가 조치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 그는 연준의 물가 목표 2% 달성 의지가 확실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부연했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FOMC 당연직 투표위원인 뉴욕 연은의 존 윌리엄스 총재는 기준금리를 한 차례 추가 인상한 뒤 동결할 것이란 전망이 합리적이라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경제지표를 살며가며 향후 결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달 2~3일의 FOMC 회의에서 지표를 토대로 금리가 결정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그의 발언은 또 기준금리 인상이 이뤄지더라도 한 차례에 그치는 게 타당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됐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기준금리 논란은 더 대립적이다. 추가 인상론에 맞서는 주장이 동결론을 넘어 금리 인하론으로 강화되어가는 경향이 엿보인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올해 4분기 무렵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을 언급해 주목받았다.

연내 금리 인하 전망은 12일 공개된 노무라증권의 보고서를 통해 또 한 번 힘을 얻었다. 노무라 보고서는 전날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동결 결정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실상 금리 인상 사이클이 종료됐다고 본다”라고 진단했다. 이창용 총재는 통화정책 회의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연내 기준금리 인하가 거론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밝혔었다. 하지만 노무라 보고서는 이 총재의 발언과 달리 한은이 인플레이션과 싸우기보다 리스크를 관리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하고 있다는 시각을 드러냈다.

노무라증권은 그 같은 분석을 토대로 한은이 올해 연말까지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내릴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나온 전망 중 가장 파격적인 인하폭이었다. 이 전망대로라면 올해 말 한은 기준금리는 2.75%로 내려가게 된다.

노무라가 제시한 논거는 예상되는 한국의 경기침체였다. 노무라증권은 하반기 경기침체가 본격화되면 한은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정도의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해야 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앞서 노무라증권은 한국 경제가 올해 -0.4%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이날의 한은 기준금리 전망은 그 같은 시각과 연결돼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노무라증권은 “주택시장 악화가 심각해지면 소비자들이 지출을 줄일 것”이라며 “이미 경제가 침체하고 있어서 향후 발표되는 경제지표들이 기준금리 인하 주장을 지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무라는 이를 토대로 한은이 8월부터 기준금리 인하를 시작해 연말까지 누적 0.75%포인트 인하를 단행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노무라의 한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는 한은이나 정부(이상 1.6%)는 물론 국제통화기금(IMF, 1.5%) 전망치보다도 크게 낮은 수준이다. 한은도 오는 5월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에 대한 수정전망치를 제시하지만 그 수준은 1%대 초중반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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