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일부이긴 하지만 식품업계가 줄줄이 가격 인하에 나서고 있다. 제조원가 인하 요인을 왜 판매가격에 반영하지 않느냐는 정부의 요구에 제조업체들이 화들짝 놀라 반응을 보이면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가격 인하 물꼬를 튼 곳은 라면 제조업체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겹치면서 심화된 공급망 혼란은 세계적으로 고물가라는 달갑지 않은 현상을 초래했다. 특히 국제유가와 곡물가의 급상승은 각 나라 국민들의 일상생활은 물론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가했다. 러시아의 가스공급 제한과 세계 굴지의 곡창인 우크라이나의 밀 공급량 축소는 공급망 혼란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를 틈타 크게 재미를 본 것으로 지목된 곳들이 정유업체와 라면제조 업체 등이었다. 그 결과 한동안 정유업체를 둘러싸고 횡재세 논란이 일더니, 이번엔 라면 업체가 타깃으로 선택됐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8일 라면 값 인상의 적정성에 대해 언급한 것이 촉매제가 됐다. 추 부총리는 방송 출연을 통해 국제 밀 가격이 라면업체들이 가격을 대폭 올린 지난해 9~10월보다 50% 안팎 내렸음을 상기시키면서 “기업들이 적정하게 가격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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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부총리의 이 발언은 후폭풍을 몰고 왔다. 사흘 뒤쯤 한덕수 국무총리가 라면 값 담합 가능성 조사 필요성을 거론했고, 그 며칠 뒤 농림축산식품부는 CJ제일제당과 대한제분 등 제분업체 관계자들을 불러 사실상 밀가루값 인하를 촉구했다. 말은 협조 요청이었지만 사실은 가격 인하를 압박한 셈이다. 압박 효과도 제분업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일련의 과정을 살펴볼 때, 정부의 협조 요청에 응하지 않을 경우 모든 업종에 걸쳐 공정거래위원회 등 사정당국을 동원해 징벌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고 할 수 있다.

라면업체들은 즉각 반응을 보였다. 4대 라면 제조업체들은 다음 달부터 가격을 인하한다고 발표했다. 대상이 제한적이긴 하지만 품목당 인하폭은 대략 5% 정도다. 라면 값 인하 여파는 과자 값과 빵 값 인하 등으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인상된 가격을 고수할 명분이 없기도 하지만 정부가 이 정도로 적극성을 띠고 나서면 버텨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이번 조치는 소비자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있다. 안 그래도 고물가에 신음하던 소비자들로서는 라면 값 인하가 반가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비자들도 경제부총리가 가격 인하를 요구할 때까지 시치미를 떼고 있던 라면 제조업체들에 대해 불만을 품어왔던 터였다.

라면 제조업체들은 라면의 주재료인 제분의 구입가격이 국제선물 가격과 시차를 두고 반영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부쩍 개선된 영업실적을 보면 그들의 해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업체들의 소행이 얄밉다 할지라도 현재 정부가 보이는 행태가 옳은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업체들에 대한 불만이 워낙 커진 탓에 당장 소비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겠지만, 정부가 시장가격 결정에 사실상 직접 개입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이는 윤석열 정부가 그토록 강조해온 시장경제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 더구나 사정 당국을 동원해 가격을 통제하려 한다는 인식을 시장 참여자들에게 심어주는 것은 결국 국가경제 전반에 대해서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요즘처럼 자본의 이동이 원활해진 시대에는 국제적으로도 부정적 인식을 심어줄 위험성이 있다.

시야를 국가 단위로 좁히더라도, 정부가 시장가격 결정에 직접 개입할 때는 반드시 혼란이 일어난다는 게 역사 속 교훈이다. 그 핵심은 정부의 직접적인 가격통제가 정상적 상거래 질서를 무너뜨려 암시장을 활성화시키고, 결국 이중가격 구조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생산활동을 하는 기업에 대해 정부가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은 자본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실제로 추 부총리가 최근 라면 값과 관련해 발언을 한 뒤 주식시장에서는 라면업체들의 주가가 출렁이는 모습을 보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 당국자의 지나친 시장 개입이 민감한 자본시장에 불확실성을 키우게 된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모든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을 일일이 통제할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도 의문스러운 일이다. 설사 정부의 시장 개입이 국민들의 열화 같은 지지를 얻는다 할지라도 그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공산 독재정권 하에서도 장마당이 생겨나 품목별 시장가격이 자연스레 형성되고 있는 현실이 그런 판단의 배경이다.

이상적이기로 치면, 최상의 방법은 이럴 때 시민운동단체가 나서주는 일일 것이다. 추경호 부총리도 라면 가격 인하 필요성을 언급할 때 이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시민사회단체가 소비자의 이익을 대변하며 기업에 대해 감시자 역할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기업 활동을 유도함으로써 국내산업의 국제 경쟁력까지 키워준다는 점에서 권장할 만한 일이다. 보다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정치색을 빼고 순수한 기본정신으로 돌아와 진정한 시민사회의 대변자가 되어 주기를 라면 값 논란을 계기로 촉구하고자 한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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