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신용평가사 피치가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강등해 세계 금융시장에 파문이 일었다. 파장이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일반적이지만 미국 정부는 크게 반발했다. 세계경제를 선도하는 국가이자 달러화 발권국으로서의 자존심이 손상됐다는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피치는 최근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최고 등급인 기존의 AAA에서 AA+로 한 단계 낮추는 조치를 취했다. 미국을 독일 등 유럽 선진국은 물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호주·싱가포르보다도 아래로 내려보낸 것이다.

이번 조치는 미국 국채의 안전성이 전보다 낮아졌으니 그만큼 조심성을 키우라는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보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안전자산의 대표 격인 미국 국채도 마냥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도발적 경고를 발한 셈이다.

[사진 =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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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가 즉각 반발하고 나선 것도 피치의 조치에 담긴 그 같은 메시지에 주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물론 미 정부의 반발은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됐다고 볼 여지가 크다. 피치가 미국 국민들의 일등국가라는 자부심에 상처를 안김으로써 결과적으로 집권 민주당에 정치적 타격을 가했다고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치의 이번 조치는 우리에게도 커다란 시사점을 남겨주었다. 우리에게는 이 점이 이번 사안에 담긴 더 중요한 메시지일 수밖에 없다. 국내 언론이 해당 소식을 대대적으로 전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실제로 피치가 밝힌 미국 신용등급 강등 이유는 마치 한국을 콕 집어 경고를 날린 것으로 이해될 만큼 우리에겐 뜨끔한 내용들이었다.

대강의 이유는 예상되는 미국의 재정 악화, 국가채무 부담 증가, 거버넌스 악화 등이었다. 재정 악화의 추정 세부 원인으로는 고령화와 그에 따른 의료비 상승 등을 거론했다. 기축통화국이라 할지라도 국가채무가 늘고 재정 건전성이 악화되면 국가의 신용도가 하락할 수 있음을 환기시켜준 것이다.

피치가 거버넌스 악화를 지목했다는 것도 우리로서는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피치는 미국의 국가채무 상환이 미 정부의 의지로 해결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우려한 것으로 분석된다. 현재 미국 정부가 차입할 수 있는 부채 한도는 31조4000억 달러(약 4경1050조원)까지 올라가 있다. 그러나 이 한도를 이미 채워 매년 한도액을 높여야 할 정도로 미 정부의 재정낭비벽은 심각한 지경이 도달해 있다. 이 한도를 내년 말까지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정부·의회 간 합의로 일차 위기를 넘겼지만 근본 원인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세부 내용은 다르지만 거버넌스 악화는 우리도 겪고 있는 문제다. 정부가 아무리 재정건전성 강화를 외쳐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제1 야당이 지금처럼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을 통해 돈 뿌리기를 하자고 우기는 한 거버넌스 안정성이 확보될 리 만무해진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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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가 미국의 신용등급을 낮추면서 고령화에 의한 재정지출 증가가 예상된다고 지적하는 동시에 재정개혁을 주문한 것도 우리에겐 예사롭지 않다. 우리야말로 고령화에 저출산 문제까지 겹쳐 재정개혁이 시급한 나라라 할 수 있다.

그나마 미국은 기축통화국이라는 강점 덕분에 국가신용 강등의 악영향을 심각하게 받지는 않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워런 버핏 해서웨이 회장 등 시장 전문가들의 분석이 대개 그런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의미다. 피치의 발표 이후 뉴욕증시가 출렁거렸고 미국 국채 수익률이 올라가는 등의 변화가 있었지만 파장의 장기화를 점치는 이들은 거의 없어보였다.

미 국채 수익률 증가를 두고는 미국 내 고용과 경제성장세가 견고하게 진행되는 바람에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이 커진 점을 원인으로 보려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일시적 국채 공급 증가가 수익률 상승을 부추겼다는 시각도 제기됐다. 신용등급 강등이 국채 수익률 상승의 온전한 이유는 아니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는 뜻이다.

다수 전문가들은 피치의 이번 조치 이후에도 미국 국채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안전자산으로 대접받게 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이유는 하나, 상대가 미국이기 때문이다. 만약 상대가 우리였다면 상황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 게 뻔하다. 기축통화국도 아니면서 피치가 지적한 모든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데다 현 경제 상황마저 미국보다 부정적인 경로를 밟아가고 있다는 점이 그런 판단의 배경이다.

만약 한국의 신용등급이 강등된다면 우리는 환율과 힘겨운 싸움부터 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달러 발권국이 아닌 만큼 당장 외화자금이 급격히 유출되는 현실에 직면할 수 있어서이다. 결국 우리로서는 피치 등 국제 신용평가사들에게 국가 신용등급을 낮출 빌미를 제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최선일 수밖에 없다.

그 중 가장 필요한 것이 흔들림 없는 재정건전성 확보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국가재정법 개정을 통해 재정준칙을 확립하는 일이다. 이 작업에서 손을 놓고 있는 국회, 특히 제1 야당의 각성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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