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월드컵축구대회가 열리기 직전의 일이었다. 당시 한국조직위원회(KOWOC)는 뜻하지 않은 난제를 만나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서구를 중심으로 일었던 개 식용 반대 캠페인이 그것이었다. 캠페인을 주도한 이는 프랑스의 유명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였고, 타깃은 야만스러운(?) 한국인이었다. 그녀는 한·일월드컵대회 개최 수 년 전부터 국내외 유관 기관에 항의 서한을 보내는 등의 방법으로 활발히 개 식용 반대 운동을 벌였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국내 반응은 견뎌낼 만한 정도였다. 한국조직위 입장에서 신경 쓰이는 것은 해외 반응이었다. 개 식용 이슈가 국제적 관심사로 떠오르며 외신에 보도되는 일이 잦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국위 선양을 위해 어렵게 준비해온 월드컵대회가 자칫 ‘한국은 야만 국가’라는 부정적 이미지만 키우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 식용 금지를 하루아침에 강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의 국민정서로 볼 때 개 식용 금지를 강제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KOWOC 관계자들이 내놓은 변이 ‘한국인들은 구는 먹되 견은 먹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구(狗)나 견(犬)이나 그 말이 그 말이지만, 황구·백구 등의 ‘구’와 애완견이란 말에 포함된 ‘견’은 유가 다르다는 주장을 개발해낸 것이다. 그 시절 KOWOC 출입기자였던 필자도 조직위 관계자들로부터 그런 주장을 기사화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 주장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서구인들의 개 식용 반대에 불쾌감을 느껴왔다. 한국의 음식문화를 야만시하는 시각 자체가 불유쾌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음식문화를 두고 우열을 가르려는 자세가 오히려 자기중심적이고 반문화적인 일이다.

나는 지금껏 개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 기자 시절 서울 도심의 유명 ‘영양탕집’들을 개고기 애호가들과 찾아가곤 했다. 혼자서 다른 메뉴를 주문하는 등 유난을 떨기는 했지만, 개고기 먹는 것을 야만이라 여기지 않았기에 그럴 수 있었다.

심지어 지구촌 오지 속 소수 부족들의 식인문화조차도 야만이라 함부로 칭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다. 그들의 식인문화도 연원을 따지고 들면 이해할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식인의식이 망자의 혼을 자신의 몸에 스며들게 한다는 진지한 믿음에서 비롯됐다면 그 의식과 거기서 파생된 음식문화 또한 나름 신성한 것으로 인정해주어야 한다.

단백질 섭취를 위한 수단으로 식인의식이 뿌리내렸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인간인 이상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먹이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그 일이 무엇이든, 공동체 질서를 해치는 일이 아니라면 모두 신성시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국의 개 식용 문화가 88서울올림픽과 2002월드컵축구대회란 양대 난관을 연이어 헤치며 존속하게 된 배경엔 서구인들의 독선적 시각에 대한 저항심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개 식용 매도 행위가 그릇된 문화적·인종적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전개됐다고 보는 시각이 한국인들의 마음 저변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개 식용 금지가 법제화됐다. 개 식용 금지법(개의 식용 목적의 사육·도살 및 유통 등 종식에 관한 특별법)이 이미 국회 의결을 마쳤고, 법 시행을 위한 절차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엔 행위의 주체가 우리로 바뀌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국가 간 인적·물적·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한국인들의 개 식용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생겨난 것이 원인이 아닌가 싶다.

주체가 바뀌었지만 지금 국내에서 강행되고 있는 개 식용 금지는 개고기 먹는 것을 죄악시한다는 점에선 본질적으로 이전 서구인들의 반대운동과 차이가 없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음식문화에 있어서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됐다. 호오(好惡)와 취향, 환경적 요인 등에 의해 자연스레 형성되는 음식문화를 옳고 그름의 개념으로 구분하려는 것, 항차 그런 취지를 법률로써 명문화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를 재차 묻고 싶어진 것이다.

사실 나는 반려견과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다. 지금도 반려견과 한 침대에서 자고 거의 매일 나란히 산책을 즐긴다. 강아지가 아프면 동물병원에 데려가고 기간에 맞춰 치아 스케일링도 해준다. 강아지에게 내 성씨도 부여해주는 등 가족의 일원으로 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인식이나 취향에 의해 취해지는 행동들일 뿐이다. 주변엔 내가 키우는 개를 싫어하고 기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개를 좋아하는 이웃이나 그렇지 않은 이웃, 개고기를 좋아하는 이웃 등등과 갈등 없이 공동체 생활을 영위해가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만 있다면 문제될 게 없다.

개 식용에 반대하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개와의 교감도가 높다는 점이 그들이 내세우는 개 식용 반대의 근본적 이유일 것이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개를 상대로 높은 교감도를 지니고 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개 식용 금지 법제화는 주류의 입장에 서 있는 개 식용 반대론자들이 상대를 향해 개와의 교감도를 높이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자연발생적인 관습이나 취향, 호오를 놓고 벌인 여론조사 결과를 법제화 시도의 한 수단으로 삼은 것도 문제다. 매사가 이런 식이라면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왼손잡이 처벌법 혹은 왼손 사용 금지법을 만들어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동물복지에 대한 인식이 확산된 점도 개 식용 반대 움직임을 강화한 요인으로 작용한 듯하다. 하지만 이 역시 설득력 있는 개 식용 금지 법제화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동물복지 논의 과정을 살펴보면 으레 생명중심주의(더 넓게는 생태중심주의) 못지않게 인간중심주의가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 식용과 관련해 정작 촘촘히 법제화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비위생적 개 사육과 도축을 엄히 금하고 관리하는 게 그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영역에 해당하는 사안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개 식용 자체는 호오와 취향의 문제일 뿐 법규상 허용 여부를 논할 이슈는 아닌 것 같다. 자신과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함부로 야만이라 칭한다면 그런 행위야말로 반문화적 야만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인식이 과도히 정치에 적용되면 그게 곧 독재가 될 수 있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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