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보기술(IT) 공룡인 인텔이 또 다른 빅테크 기업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잡고 반도체 공정 미세화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파운드리(주문형 반도체 위탁생산) 부문에서 선두권을 형성한 대만 TSMC와 삼성전자보다 한 발 앞서 1.8nm(나노미터: 1nm는 10억분의 1미터) 반도체 양산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인텔은 지난 21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다이렉트 커넥트’ 행사를 열고 그 같은 방침을 천명했다.

인텔의 선언은 안 그래도 파운드리 시장의 압도적 선두 주자인 TSMC와 힘겨운 경쟁을 벌여오던 삼성전자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일 수 있다. 아직 기술력에서 앞서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고군분투하고 있는 삼성전자로서는 미국 정부의 대대적 지원을 업고 경쟁에 뛰어드는 인텔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 반도체 생산업체들은 미세 공정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반도체 회로의 선폭을 가능한 한 가늘게 하는 작업에 전사적 역량을 쏟아붓고 있다는 의미다. 반도체는 회로 선폭이 좁을수록 소비전력이 줄고 정보 처리 속도는 빨라진다는 특징을 지닌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현재 미국은 반도체 산업 분야에서 중국에 대대적 제재를 가하고 있다. 제재의 초점은 미세화 기술 개발 방지에 모아져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자국 기업은 물론 삼성전자 등까지도 중국 내 공장으로는 첨단 장비와 기술을 유입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중국에게는 낮은 기술로도 생산이 가능한 비첨단 반도체(레거시 반도체) 생산만 허용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전략적 결정이다.

인텔의 선언은 매우 도발적이다. TSMC와 삼성전자가 2나노급 반도체 생산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경쟁중인 와중에 1.8나노 칩을, 그것도 연내에 양산하겠다고 나섰으니 세계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인텔의 자신감을 뒷받침하는 것이 미 정부의 대대적 지원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충격 강도는 더 커지게 된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인텔에 지원하기 위해 논의 중인 자금 규모는 우리 돈 13조원 이상이다. 이 같은 대대적 지원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의 반도체 패권 확립을 위해 2022년 8월에 서명한 반도체산업 육성법(일명 ‘칩스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도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지만 미국이 칩스법을 통해 지원하는 총 규모(약 350조원)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 할 수 있다. K칩스법이 국회를 통과하던 당시인 지난해 3월에도 야당에서는 ‘5년간 7조원’의 돈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에 지원한다는 데 대한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K칩스법은 반도체 분야 같은 국가전략산업에 설비투자를 할 때 세제지원을 한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대기업·중견기업의 설비투자 세액공제 비율을 기존 8%에서 15%로 늘린다는 것 등이 골자였다.

이처럼 인텔에 비해 불리한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2나노급 칩의 양산 목표 시점을 2025년으로 잡고 TSMC와 경쟁중이다. 2나노 양산 경쟁에는 일본의 8개 대기업연합군인 ‘라피더스’도 참전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텔이 ‘1.8나노 연내 생산’을 목표로 제시했으니 쇼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텔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일부 회의적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인텔이 2021년 봄 반도체 공급난이 한창이던 때 야심차게 파운드리 사업에 뛰어들었고, 때맞춰 미 정부가 칩스법을 앞세워 반도체 패권을 국가적 목표로 설정해둔 정황 등을 고려하면 인텔의 도전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을 것 같다.

미국은 그간 비교우위 등의 이유로 설계(팹리스)에 치중하면서 대만과 한국에 주문형 반도체 생산을 위탁하는 전략을 취해왔다. 그 결과 미국은 반도체 최고 수요국(아시아개발은행 자료 기준으로 약 35%)이면서도 세계적 생산 비중에서는 20%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한때 40%가량을 자랑했던 시절에 비하면 생산비중이 절반으로 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반도체 생산 장비 제조기술이나 칩 설계 기술 모두에서 여전히 세계 최강의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런 미국이 인텔 같은 공룡을 앞세워 시장 공략에 나설 경우 세계 반도체 산업 지형이 요동칠 것이라 여기는 것은 상식적인 판단이다.

누차 강조돼온 바이지만 반도체 개발 분야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속도다. 이에 따라 미국이나 대만·일본 정부는 저마다 특별법을 앞세워 세제 지원에 나서는 것은 물론 공장건설 관련 규제를 과감히 해제하고 반도체 생산의 필수 요건인 전력과 용수 공급을 도와주는 한편, 인재 양성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반도체에 대한 수요는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더욱 커지고 있는 추세다. 첨단 기기일수록 최첨단 반도체 사용 밀도가 높아지는 게 근본적인 이유다. 단위 기기에 사용되는 칩의 개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세계의 선진 강국들은 지금 자국 기업들과 손잡고 반도체 산업 전장에 뛰어들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이 혼자 힘으로 고군분투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국가의 미래를 팽개치는 것과 같다. 그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권을 포함하는 범국가 차원의 각성이 필요하다 하겠다. 그 이전에 정부부터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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