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신용평가사 피치가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을 ‘AA-’로 유지했다. 신용등급 전망도 기존대로 ‘안정적(Stable)’이라 평가했다. 지금의 신용등급 상태를 당분간 더 이어갈 것이라는 판단 결과를 대외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 6일 기획재정부를 통해 확인됐다.

저성장 기조 등에 대한 우려가 자주 제기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한국에 대한 피치의 이번 평가는 비교적 우호적이라 할만하다. 피치는 한국 경제가 올해 2.1% 성장할 것이란 지난해 10월의 전망도 그대로 유지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 증가 등에 힘입어 수출이 내년까지 긍정적 추세를 이어갈 것이란 분석이 그런 전망의 배경이었다.

일각에서 제기돼온 금융 안정성 논란에 대해서도 피치는 비교적 차분한 평가 결과를 제시했다. 이와 관련, 피치는 “고금리 위험에도 불구하고 리스크가 잘 관리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은행들의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에 의한 위험도도 높지 않다고 진단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피치는 이번 평가 결과가 대외 건전성, 거시경제 회복력, 수출 부문의 역동성, 지정학적 리스크 및 거버넌스 지표 부진, 고령화 등에 따른 구조적 문제 등을 두루 반영해 추출됐다고 설명했다.

한국경제에 대한 분석 중엔 논란의 와중에 있는 재정수지 사안도 포함돼 있었다. 피치는 한국의 재정수지 적자폭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재정준칙 법제화 안건이 아직 국회에 계류돼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재정준칙 법제화 추진 동력이 오는 4월 총선 결과에 따라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피치의 보고서 내용은 전반적으로 우리에게 안도감을 안겨줄 만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고서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을 냉정히 읽어내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고서 내용을 읽어야만 우리가 국가의 대외신인도를 높게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지정학적 리스크를 제외하고는 신인도 평가 요소 대부분은 정부와 정치권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개선해 나갈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로서는 가장 시급히 개선해야 할 문제가 재정준칙 법제화다. 이 사안은 중장기 계획을 수립한 뒤 차근차근 풀어가야 할 거버넌스 지표 부진, 고령화·저출산 문제 등과 달리 비교적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대상이다. 이는 정부와 정치권이 현실을 엄중히 인식하고 실행 의지만 모을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완결지을 수 있는 과제에 해당한다.

과제 이행을 위해 특히 중요한 것이 정치권의 현실 인식이다. 피치의 국가신용도 등급이 13년째 유지돼 왔다지만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된다거나 상향조정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간 피치 등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한국의 신용등급을 언급하면서 가장 빈번하게 지적한 것이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문제였다. 당장 피치부터도 불과 2년 여 전까지는 우리나라의 국가부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점을 들어 신용등급 변화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었다.

하지만 그 같은 우려는 윤석열 정부가 건전재정을 기치로 내걸고 총지출 증가를 억제하려는 노력을 펼치면서 조금씩 누그러지는 듯 보였다. 피치는 이번 보고서에서도 한국 정부가 지난해에 2024년도 예산안을 짜면서 총지출 증가율을 2.8%로 제한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문제는 정부의 건전재정 추구 의지가 나날이 약화되어가고 있는 듯 비쳐진다는 점이다. 그런 징후는 총선 정국이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특히 우려를 낳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 민생토론회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돌며 재정지출과 관련된 약속들을 쏟아내고 있는 현실이다. 일일이 나열할 것도 없이 그런 내용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를 통해 일반에 전달되고 있다.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야당이 오죽했으면 최근 두 달여 동안 민생토론회에서 약속한 내용만 이행하려 해도 900조원 이상이 든다고 주장했겠는가.

지역 순회 형식의 민생토론회 실행 등을 선거 캠페인으로 볼지를 두고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그와 관련된 판단은 일단 유보하고자 한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신없이 쏟아지는 정책 약속들로 인해 현 정부의 건전재정 의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와 대통령실부터 이쯤에서 감정을 추스르며 피치의 평가 보고서 내용을 다시 한 번 냉정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대표 필자 편입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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