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적 사례로 꼽혀왔던 유한양행의 윤리적 지배구조에 일대 변화가 생겨났다.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유지에 따라 경영권 세습 없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채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제1의 가치로 삼아왔던 유한양행의 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역사적 변화는 15일 열린 유한양행 정기 주주총회를 통해 이뤄졌다. 이날 주총에 지배구조 변경을 위한 정관 일부 변경 안건이 상정됐고, 해당 안건은 논란 속에 가결됐다.

유한양행의 독특한 지배구조는 당사의 사사(社史)를 넘어 대한민국 기업사(史)에 길이 남을 윤리적 기업의 표본이었다. 국내 제약업계 매출 1위인 유한양행의 최대 주주는 16%가량의 지분을 가진 유한재단이다. 이사장을 포함한 이사 10명 등으로 구성된 이 공익재단은 기업활동을 통해 얻은 이익을 토대로 청년교육 지원과 사회복지, 빈곤구제 사업 등의 활동을 벌여왔다. 이는 기업의 이윤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창업자의 유지에 따른 것이었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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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 주총을 계기로 유한양행 경영진이 그동안 없었던 회장과 부회장 직제를 신설하기로 했고, 그 시도가 정관 개정을 통해 이뤄졌다. 사외이사의 적극적 참여 등으로 이뤄진 수평적 지배구조가 일반 기업과 같은 수직적 구조로 바뀌게 된 셈이다. 변화 시도의 명분은 ‘혁신’과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약’이었다. 이를 위해 우수한 경영인을 영입해야 하고, 그에 대한 준비의 일환으로 직제를 유연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게 정관 변경 추진 세력의 변이었다.

경영진이 그간 외부에 밝혀온 주장들을 종합하면, 그 내용은 △회장직을 만드는 것이 창업자의 기업가 정신을 계승해 회사를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일이며 △글로벌 기업으로 더 성장해 혁신신약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 외에 전세계인을 질병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여타 기업들처럼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빠르고 과감한 의사결정이 가능해져야 유한양행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 경영진의 생각인 듯 보인다.

그러나 그간 유한양행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사회친화적인 기업 지배구조를 지닌, ‘착한 기업’의 표본으로 자리매김해온 게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상업주의가 횡행하는 현대 사회에서 유한양행은 기업윤리를 실천하는 표상으로 인식돼온 측면이 있었다.

그 표본이 사라지려 하자 회장직제 신설에 저항해온 직원 수백명은 주총 당일에도 회사 앞에서 트럭시위를 이어가며 정관 변경 반대 구호를 외쳤다. 유일한 박사의 유일한 직계 후손인 유일링 유한학원 이사 또한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지배구조 변경에 반대한다는 뜻을 수차 밝혔다.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기업에 있어서 이윤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도덕성(Integrity)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에 거주 중인 유일링씨는 최근 귀국해 이날 주총을 참관했다. 그 자체가 정관 개정에 반대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정관 개정에 반대해온 직원들은 회장직제 신설이 특정세력의 유한양행 사유화를 위한 기반 닦기용이라 주장하고 있다. 트럭시위 참여자들 다수는 당사자의 부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대상으로 이정희 유한양행 이사회 의장을 거론하고 있다.

회장직제 신설에 반대해온 직원들은 또 유일링 유한학원 이사의 재단 이사직 복귀를 요구하고 있다. 회장직을 특정한 인물을 의식해 만든 것이 아닌 만큼 당분간 그 자리를 비워둘 것이라는 경영진의 주장을 불신하고 있는 데 따른 요구인 듯 여겨진다.

내부 정황이 어떠하든 기업의 합법적 자율결정을 두고 외부인들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섣부른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유한양행 사태는 많은 아쉬움을 남겨준 게 사실이다. 윤리적 기업의 표상으로서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높이는데 기여해온 소중한 사회적 자산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유한양행 사태는 아쉬움과 함께 긴 여운을 남길 것으로 예상된다. 사태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과 논란은 우리 모두에게 기업과 사회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며, 기업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성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요구에 가장 먼저 부응해야 할 이들이 유한양행의 현 경영진일 것이다. 그들은 유한양행의 지배구조 변경이 단순히 연 매출 2조에도 못 미치는 일개 제약회사의 일일 수만은 없다는 점을 두고두고 명심해야 할 것이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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