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직면한 중국 부동산 개발업체인 헝다(恒大·Evergrande)그룹이 여전히 백척간두에 서 있다. 지난 23일까지 반드시 갚아야 했던 채권이자를 상환함으로써 첫번째 디폴트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이번 주부터 갚아야 할 이자 지급일이 연이어 다가오는 만큼 헝다그룹의 유동성 위기가 근본적으로 해소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 관영 증권시보(證券時報) 등에 따르면 헝다그룹은 지난 21일 달러화채권 이자 8350만 달러(약 982억원)를 수탁기관인 씨티은행에 보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끈 셈이다. 하지만 헝다그룹의 위기가 획기적으로 개선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헝다그룹은 당초 지난달 23일까지 8350만 달러의 이자를 지급해야 했지만 채무를 해결하지 못했다. 채권계약에 따라 30일간의 유예기간이 주어져 최종 마감 시한인 이달 23일까지 이자를 갚지 못하면 디폴트가 될 상황이었지만 간신히 이를 모면한 것이다.

중국 광둥성 선전시에 있는 헝다 본사. [사진 = 로이터/연합뉴스]
중국 광둥성 선전시에 있는 헝다 본사. [사진 = 로이터/연합뉴스]

헝다그룹의 이자를 갚아야 하는 부채는 6월말 기준 5717억 위안(약 105조원)이다. 이중 2400억 위안은 1년 안에 만기가 돌아온다. 헝다그룹이 가용할 수 있는 현금성 자산(867억 위안)의 3배에 이른다. 내년부터 채권 만기가 시작돼 원금도 갚아야 하는 부채는 2022년 77억 달러, 2023년 108억 달러로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당장 이번 주부터 또 고비다. 지난달 29일(4750만 달러)과 이달 11일 내지 못한 달러화 채권 이자(1억4800만 달러) 지급일이 30일의 유예기간을 마치고 연이어 찾아온다. 우선 오는 29일과 내달 11일에 이자를 지급하지 못하면 디폴트가 확정된다. 내달 6일에는 8200만 달러, 12월 28일에는 2억5500만 달러 지급 기일도 예정돼 있다. 연말까지 남게 되는 이자비용만도 5억3250만 달러다. 내년까지 상환해야 할 달러화·위안화 채권 규모는 무려 74억 달러에 이른다. 투자은행 코어퍼시픽 야마미치 리서치 부문장인 캐스터 팡은 “헝다그룹의 디폴트 위기가 또 다가오고 여전히 많은 부채를 갖고 있는 탓에 시장은 관망세에 있다”며 “유동성이 너무 나빠 다른 빚을 갚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까닭에 헝다그룹은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넘기기 위해 부동산 관리사업 계열사인 헝다물업(物業)과 보유 부동산 등 핵심 자산을 급매물로 내놨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헝다물업 지분 50.1%를 부동산 개발업체 허성촹잔(合生創展)에 매각해 200억 홍콩달러(약 3조원) 정도의 자금을 조달하려 했지만 대금 지급방식을 둘러싸고 이견이 생기는 바람에 무산됐다. 미국 경제매체 CNBC방송은 “헝다그룹이 계속 방법을 찾겠지만 아직은 회의적인 시각이 훨씬 많다”고 내다봤다.

1996년 창업한 헝다그룹은 세계 280개 도시에서 1300개 건설사업을 진행 중이며 직원은 25만명에 이르는 중국 2위의 부동산 개발업체다.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어렵사리 우한(武漢)과학기술대를 졸업한 쉬자인(許家印) 창업자 겸 회장은 허난(河南) 우양(舞陽)철강의 말단 직원으로 출발해 한때 중국 최대 부자로 등극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부동산 호황에 힘입어 떼돈을 번 그는 부동산업 외에도 전기자동차, 테마파크, 생수, 식료품, 헬스케어, 프로축구단 운영 등 다양한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문어발식 확장 탓에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결과 헝다그룹의 총부채는 2분기 말 현재 3050억 달러로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2%에 이르게 됐다.

그렇지만 중국 정부는 헝다그룹 위기가 통제가능한 만큼 중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이라고 겉으로는 느긋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중국 은행보험감독관리위원회(우리의 금융감독원에 해당)는 최근 “헝다그룹의 위기가 업종이나 기업 전체 신뢰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며 “개별 기업의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문어발식 확장과 도덕적 해이가 만연한 헝다그룹을 구제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을 재차 확인한 것이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중국 당국은 지난해 말부터 정책적으로 과도한 차입에 의존한 부동산 개발업체들의 사업 관행에 메스를 대기 시작했다. 때문에 헝다그룹의 디폴트 위기는 주택가격 안정과 국가의 장기적 위험 요인 제거를 위한 ‘개혁’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일부 고통일 뿐이라는 것이 중국 정부의 판단이다. 이런 만큼 헝다그룹 위기가 전체 부동산 업계의 위기, 나아가 금융권으로 전이되지만 않는다면 당국이 헝다그룹의 파산도 방치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반면 다른 일각에서는 헝다그룹 위기가 중국 GDP의 25%가 넘는 부동산 산업을 심각히 위축시키면서 경기 둔화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 수 있는 만큼 정부가 최소한의 관리와 개입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록펠러 글로벌 패밀리 오피스의 지미 창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중국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해결책을 내놓을 것으로 본다”며 “3000억 달러 규모 헝다그룹의 부채를 청산하지 않으면 연달아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결국 자금력이 있는 국유기업이 인수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헝다그룹은 투자자 달래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자를 갚아 첫번째 급한 불을 끄고 전기자동차로 사업 방향을 선회하는 모습을 보인 데 이어 중단된 프로젝트까지 다시 시작하면서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헝다그룹은 24일 광둥(廣東)성 선전(深圳) 을 포함한 6개 도시에서 10여개의 부동산 프로젝트를 재개했다. 현재 중국 전역에서 1300여개의 부동산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지만, 디폴트 위기로 대부분 작업이 중단된 상태에 있다. 헝다그룹은 앞선 22일 지난해 7000억 위안이던 부동산 사업 매출을 앞으로 10년 내 2000억 위안 수준으로 70% 이상 줄이기로 했다. 헝다는 부동산 사업 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대신 전기차 주력 기업으로 변신하는 내용의 사업재편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헝다는 현재 광둥성 광저우(廣州)의 세계 최대 축구경기장 건설을 계획대로 추진하고 있다.

전문위원(전 서울신문 선임기자·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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