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퇴직(특별퇴직)을 통해 짐을 싸 집으로 돌아가는 은행원들이 연말까지 4000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씨티은행의 소매금융 철수 결정과 온라인금융 전환에 따른 점포·인력 축소, 사상 최대 실적을 바탕으로 이전보다 좋은 퇴직조건 등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은행권에 따르면 SC제일은행은 지난달 8~15일 특별퇴직 신청을 한 575명을 같은 달 29일자로 내보냈다. 대상자는 근속기간 10년 이상으로 1970년대생을 포함한 만 42~50세 임직원들이다. 영국계 모기업 스탠다드차타드(SC)그룹이 지난해부터 전세계 해외 네트워크를 대상으로 벌인 구조조정 칼바람이 우리나라에도 불어닥친 것이다. SC제일은행은 그동안 임금피크제에 해당하거나 임박한 직원 등을 상대로 1년에 한 번씩 특별퇴직을 진행해왔다. 특별퇴직자 수는 ▲2015년 962명 ▲2019년 154명 ▲2020년 29명으로, 2015년 이후 올해가 가장 많다. SC제일은행 측은 1인당 최대 60개월분의 특별퇴직금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고한도는 6억원으로 퇴직금과 연령에 따라 최고 6000만원까지 창업지원금이 지급되고 4000만원까지 자녀학자금도 제공된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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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금융 부문 철수를 발표한 한국씨티은행도 지난 10일까지 소매·기업금융 부문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접수를 받았다. 근속기간 만 3년 이상 정규직원과 무기 전담직원이 희망퇴직을 신청하면 최대 7억원 한도 안에서 정년까지 남은 개월 수만큼(최장 7년) 기본급의 100%를 특별퇴직금으로 받을 수 있다.

퇴직자에게는 창업·전직 지원금 2500만원도 추가 지급된다. 희망퇴직 조건이 좋아 3400여명인 씨티은행 직원 중 소매금융 인력을 중심으로 최소 절반 이상이 희망퇴직을 신청할 것이라는 관측이 진작부터 제기됐다. 특별퇴직금에 더해 근속연수에 따라 늘어나는 누진제 방식의 퇴직금까지 고려하면 소비자금융 부문 직원 2400명 가운데 절반만 나가도 희망퇴직 비용은 1조원을 훌쩍 넘어선다. 금융권에 따르면 국민·신한·우리·하나·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에서 지난해 연말 희망퇴직 등이 포함된 해고비용은 2019년(8050억원)보다 소폭 증가한 8310억원에 이른다.

다른 은행에서도 희망퇴직자가 부쩍 증가하는 추세다. KB국민은행의 경우 올해 1월 말 800여명이 희망퇴직했다. 2020년(462명), 2019년(613명)보다 많고 2018년(407명)의 2배에 이른다. 신한은행은 1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희망퇴직을 통해 각각 220명, 133명씩 올해 353명을 내보냈다. 신한은행은 한 해 두 번의 희망퇴직으로 희망퇴직자 수도 2018년(700여명) 이후 가장 많다. 우리은행에서도 올해 1월 말 468명이 희망퇴직 형태로 나갔다.

올해 SC제일은행 등 4개 시중은행에서만 2200명 가까이 떠났고 씨티은행 직원의 절반만 희망퇴직에 응해도 주요 은행을 떠나는 직원이 올 한해 4000명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하나은행의 희망퇴직자도 2019년 369명에서 지난해 574명으로 크게 늘었고, 오는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올해 희망퇴직 신청이 시작되면 지난해 규모를 넘어설 가능성이 있다. NH농협은행에서도 지난해 496명이 희망퇴직했다. 올해 시중은행들의 이익이 사상 최대를 기록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희망퇴직을 통해 짐을 싸는 직원 규모가 역대급에 이르는 아이러니한 현상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은행권에서 희망퇴직 행렬이 길어지는 것은 과거에 비해 퇴직조건이 전반적으로 좋아진 데다 대상 직원 범위도 확대된 까닭이다. SC제일은행의 경우 올해 특별퇴직자는 직위·연령·근속기간에 따라 최대 6억원까지 36∼60개월분(월 고정급 기준)의 특별퇴직금을 받았다. 지난해 산정 기준(최대 38개월)과 비교하면 많게는 수억원 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KB국민은행도 올해 희망퇴직 대상자는 1965생부터 1973년생까지로, 지난해(1964∼1967년생)보다 대상이 크게 확대돼 40대 직원도 신청이 가능했다. 신한은행은 희망퇴직자에게는 연차와 직급에 따라 최대 36개월치의 특별퇴직금을 줬다. 은행 측에서는 비대면 금융거래 증가로 인력 수요가 줄어드는 마당에 퇴적조건을 개선해서라도 인력을 대폭 감축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올해는 가계대출 급증과 금리상승에 따른 예대마진(예금과 대출의 금리차 수익) 확대 등으로 사상 최대 이익이 예상되는 만큼 주머니도 두둑한 상황이다. 은행권은 올해 상반기 역대 최대 실적(9조3729억원)을 기록한데 이어 3분기 실적도 호조를 보이는 등 올 한해 사상 최대의 실적으로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금리상승에 따른 예대마진이 상승추세에 있고 비은행 분야 수익도 꾸준히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권에 따르면 국내 4대 금융지주(KB·신한·하나·우리)의 3분기 지배주주 기준 순이익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8.8% 증가한 3조8651억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역대 3분기 순이익 기록 중 최대 규모다.

하지만 은행권의 ‘퇴직자 돈잔치’에 대한 여론은 싸늘하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국민과 국가의 큰 도움을 받은 은행권이 ‘이자와 수수료놀이’로 손쉽게 이룬 사상 최대 실적을 국민에게 되돌려주기는커녕 자기이익 챙기기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외환위기 당시 무분별한 기업대출로 부도위기에 몰린 대다수 은행들은 한 해 국내총생산(GDP)의 13%에 해당하는 64조원의 공적자금을 수혈받아 기사회생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땐 은행들이 달러 유동성 위기에 몰리자 정부는 1000억 달러 대외채무 지급보증 등 대규모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해 은행들을 구제했다. 은행 통폐합으로 몸집을 불린 은행들은 과점체제 하에서 연간 3조~4조원대에 이르는 예대마진과 고위험 투자상품을 마구 내다팔아 천문학적 수수료를 챙기는 수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려왔다. 은행들은 이를 공적자금 갚는데 먼저 쓰지 않고 억대 연봉과 최고의 복지를 제공하는 ‘신의 직장’을 만드는데 썼고, 한술 더 떠 조기 퇴직자에게 수년치 연봉을 안겨주는 ‘퇴직금 잔치’를 해마다 벌이고 있다.

전문위원(전 서울신문 선임기자·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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