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중고차 판매업이 ‘생계형업종’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림에 따라 3년 넘게 이어진 중고차 시장 개방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대기업의 중고차 시장 진출을 허용하는 규제완화를 계기로 소규모 업체들이 장악한 중고차 시장에 무한경쟁을 통한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 17일 열린 ‘중고차 판매업 생계형 적합업종 심의위원회’에서 중고차 판매업을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지정하지 않기로 최종 의결했다고 밝혔다. 심의위원회는 중고차 판매업이 생계형 적합업종 지정요건 중 ‘규모의 영세성’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심의위는 중고차 판매업이 도·소매업, 자동차·부품판매업과 비교해 ‘소상공인 비중이 낮고 연평균 매출액이 크며 무급 가족종사자 비중이 낮은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중고차 시장이 지속 성장하고 있으며, 완성차업계의 진출로 제품의 신뢰성을 확보하고 소비자 선택의 폭이 확대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했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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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위는 다만 현대자동차와 기아가 중고차 시장에 진출하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피해가 예상되는 까닭에 향후 ‘중소기업사업조정심의회’에서 적정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부대의견을 내놨다. 박순홍 중기부 상생협력지원과장은 “현재 당사자 간 자율조정이 진행 중이며, 중소기업 피해실태 조사 이후 사업조정심의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국내 중고차 시장규모는 선진국보다 작은 편이다. 2020년 기준 시장규모는 387만대다. 중복거래를 제외하면 259만대로 연간 신차판매량의 1.4배 정도다. 미국은 신차판매량의 2.4배, 유럽은 2배 규모다. 미국과 유럽은 대형업체가 시장을 주도하며 신뢰성을 확보했고, 다양한 신기술을 도입해 소비자 편의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고차 연간 거래량이 지금보다 50만대 이상 커질 전망”이라며 “대기업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면 거래과정이 투명해지고 소비자 편의성도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부가 대기업의 중고차시장 진출을 허용한 이유는 현재 시장이 왜곡돼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고차 시장은 판매자와 구매자 간 정보 비대칭이 심한 대표적인 ‘레몬마켓’(저급품만 취급하는 시장)으로 불린다. 허위매물 등으로 인한 소비자 피해가 잇따르는 바람에 품질을 보증할 완성차업계의 진출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실제로 한국소비자연맹이 지난해 12월 중고차 구매경험이 있는 소비자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6%가 대기업의 중고차 시장진출에 긍정적으로 답했다. 응답자들은 고지·설명과 다른 성능·상태(45.4%), 사후관리 미비(39.9%), 허위·미끼매물(29.7%) 등을 불만사항으로 꼽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5년간 1372소비자상담센터에 등록된 중고차 상담건수는 4만3903건에 이른다. 하지만 피해구제가 이뤄진 것은 이중 2.2%(947건)에 불과했다. 2020년 전경련의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 80.5%가 중고차 시장이 ‘불투명·혼탁·낙후’한 상태에 있다고 지적했다.

중고차 시장개방으로 현대차 등 완성차업체뿐 아니라 렌털 대기업까지 시장진출을 선언했다. 국내 1위 렌털업체인 롯데렌탈은 올해 하반기 B2C(기업과 소비자간 거래) 중고차 시장에 진출한다고 최근 밝혔다. 현재 운영 중인 중고차 경매장(롯데오토옥션)과의 시너지를 통해 2025년까지 중고차 시장의 10%를 차지하겠다는 목표도 공개했다. 롯데렌탈은 온라인으로 판매와 중개, 렌털, 중고차 인증 및 사후관리 등 비대면 서비스를 제공하고 전시장, 시승, 정비체험 등 오프라인 서비스와 연계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김현수 롯데렌탈 대표는 “중고차 B2C 서비스 진출을 포함해 통합 모빌리티 플랫폼 기업으로 거듭나겠다”고 강조했다. SK렌터카 등 다른 렌터카 업체들도 중고차시장 진출을 검토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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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차 판매업은 2013년 2월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됐다. 2019년 1월 지정기한이 끝나자 중고차 매매업계는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지정해줄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이에 완성차 업체들은 수입차 브랜드가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인증 중고차를 판매하고 있는 것은 ‘역차별’이라고 주장해 왔다. 수입차는 인증 중고차 사업을 통한 소비자관리를 신차판매로 연결하면서 신차 및 중고차 시장점유율을 키웠다. 중기부는 같은 해 11월 동반성장위원회로부터 ‘부적합’ 의견서를 받고도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사이 업계 간 갈등이 심화되고 소비자들의 불만도 커졌다.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가 중재에 나섰으나 합의안 도출에 실패했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중기부의 빠른 결정을 촉구하는 여론이 거세지자 완성차업계는 중고차 시장진출 채비를 갖췄다. 지난 1월 현대차는 경기 용인시, 기아는 전북 정읍시에 중고차매매업 등록을 신청했고 현대차는 시의 허가를 받아냈다. 현대차는 지난 7일 완성차 업체로는 처음으로 중고차 시장계획을 공개했다. 구입 후 5년·주행거리 10만㎞ 이내 자사 차량에 대한 정밀검사를 실시하고, 이를 통과한 차량만 선별해 인증 중고차로 팔기로 한 것이다. 쌍용차는 “가능한 한 빨리 진출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사업성을 검토 중이다 한국GM과 르노코리아자동차도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결정에 기존 중고차 업체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중고차 업체들은 그동안 경매로 매물을 확보해 판매하는 중고차 시장에 자금력과 브랜드파워를 갖춘 대기업들이 들어오면 시장을 독점할 뿐 아니라 가격상승도 초래해 결국 소비자만 손해를 볼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병규 전국자동차매매사업조합 전남조합장은 “대기업의 독과점과 이에 따른 영세 종사자들의 몰락 및 소비자 피해가 우려된다”며 “시장점유율을 일정수준으로 제한하겠다는 대기업 측의 말은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 지해성 한국자동차매매사업조합연합회 사무국장은 “상품단가가 높은 업계 특성상 매출액은 많을지라도 실제 구성원들의 한 달 수입은 150만원 수준”이라며 “영세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업종인데 심의위는 이런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생산된 지 1∼3년 된 수익성 높은 중고차가 대기업에 몰릴 수밖에 없어 2∼3년 안에 영세업자의 수입이 20∼30% 줄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문위원(전 서울신문 선임기자·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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