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에서 600억원대의 대규모 횡령사건이 발생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횡령사건이 일어난 우리은행은 금융지주 이사회에 ‘내부통제관리위원회’까지 두고 있지만 10여년간 횡령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경찰과 우리은행에 따르면 우리은행 직원 전모 차장은 2012년 10월12일, 2015년 9월25일, 2018년 6월11일 등 3차례에 걸쳐 614억5214만원(잠정)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전 차장은 우리은행에서 10년 이상 재직하는 동안 횡령 당시부터 최근까지 구조개선이 필요한 기업을 관리하는 기업개선부에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전 차장의 계좌를 통해 자금흐름을 파악하던 중 횡령금 일부가 그의 동생에게 흘러간 단서를 포착하고 같은 혐의로 동생도 체포했다. 전 차장이 횡령한 돈은 2011년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수를 시도했던 이란 가전업체 엔텍합으로부터 몰수한 계약금의 일부인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은행은 2010∼2011년 대우일렉트로닉스 매각 주간사였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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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령사건이 적발된 것은 미국의 대(對)이란 제재가 풀렸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동안 미국의 이란 제재로 국제송금을 하지 못하다가 올해 초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실(OFAC)이 특별허가서를 발급하면서 계약금 지불이 가능해졌다. 우리은행이 정부가 예치해 놓은 계약금 반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횡령사실을 적발하고 전 차장을 지난달 27일 고발하자 그는 같은 날 경찰에 자수했다.

이번 사건은 4대 시중은행 중 하나인 우리은행에서, 그것도 지점이 아니라 본점에서 거액의 횡령사건이 발생했는데도 10년 이상 아무도 몰랐다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다. 우리금융지주는 4대 금융지주 중 유일하게 이사회 내에 감사위원회와 별도로 내부통제관리위원회를 설치하고 자회사의 내부통제 운영실태 등을 검토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횡령사건과 관련해선 내부통제 시스템이 제때 작동하지 못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대책을 마련해도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직원이 벌이는 범죄인 만큼 내부통제 장치를 우회할 수 있다”며 “기술 개발로 범죄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벌백계의 본보기로 징계 수위를 높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횡령금액 자체도 금융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큰 액수다. 금융감독원의 ‘2021년 업권별 유형별 금전사고 현황’ 중 ‘횡령 유용’ 항목에 따르면 7개 은행(신한·KB국민·하나·우리·기업·NH농협·SC제일)의 전체 횡령금액은 지난해 67억6000만원(16건)에 불과했다. 즉 지난해 은행권에서 발생한 횡령·유용 사고액을 모두 합친 것의 9배가 넘는 금액을 한 사람이 횡령한 셈이다.

과거 대규모 횡령사건으로는 2005년 조흥은행 면목남지점에서 자금결제 담당 직원이 공금 400억원대를 빼돌린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직원은 은행 대외차입금을 순차적으로 상환하는 것처럼 속여 412억원을 16차례에 걸쳐 빼돌린 뒤 파생금융상품에 투자하다 적발됐다. 2013년에는 KB국민은행 직원이 국민주택채권 등 채권을 시장에 내다파는 수법으로 90억원대의 자금을 횡령한 바 있다. 국민주택채권은 채권 만기가 도래하면 원리금을 받을 수 있지만 소멸시효가 지나면 국고에 그대로 귀속된다. 이 직원은 만기가 지나 국고로 귀속되기 직전의 국민주택채권을 위조한 뒤 영업점 직원의 도움을 받아 현금 상환하는 수법으로 90억원가량을 횡령했다. 2014년에는 경남은행에서 직원이 16억원을 빼돌린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또 2017년에는 KEB하나은행 직원이 13억원을 횡령한 사실이 적발됐다. 충남 천안 모지점의 출납 업무를 담당하던 2년 차 직원이 당시 정상 화폐를 사용 불가능한 손상 화폐로 분류하는 수법으로 은행 자금을 횡령하다 해당 지점의 정기 자체감사 과정에서 적발됐다. 지난해 1월 하나은행에서는 부산지역 지점 직원이 대출상환 일정을 임의로 조정한 부당대출로 30억원가량을 횡령한 사실이, 같은 해 농협은행에서는 친·인척 명의도용으로 27억5000만원을 ‘셀프 대출’한 사건이 각각 적발됐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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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가 생명’인 제1금융권 은행에서 대규모 횡령사건이 발생하면서 금융당국의 책임론이 커지고 있다. 횡령 행위가 장기간에 걸쳐 반복해 발생했음에도 금융당국이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다.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우리은행 직원의 횡령이 발생한 기간에 우리은행에 대해 10여 차례나 검사를 나갔지만 이 같은 정황을 전혀 적발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금감원은 2012년부터 2018년까지 우리은행에 대해 일반은행검사국과 기획검사국, 은행리스크업무실, 외환감독국, 금융서비스개선국, 연금금융실 등을 동원해 모두 11차례 종합 및 부문 검사를 실시했다. 정은보 금감원장은 “(금감원 검사에서 횡령사실을) 밝혀냈으면 바람직한데 왜 감독을 통해 밝혀지지 않았는지도 조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지난해 12월부터 2개월간 우리은행에 대한 종합검사도 진행했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우리은행과 우리금융지주 정기 검사를 다녀왔는데 당시에는 은행의 건전성과 전반적인 내부통제 시스템을 평가하는 데 중점을 뒀던 것으로 안다”며 “은폐돼 있는 개별 사건을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털어놨다.

더욱이 2000만원(현재 1000만원) 이상의 현금 거래나 의심스러운 거래는 금융정보분석원(FIU) 보고대상임에도 문제점이 적발되지 않은 점도 석연치 않다. 우리은행은 2019년 FIU 보고 의무 위반으로 징계를 받은 바 있다.

우리은행을 외부감사한 회계법인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에 따라 금감원은 우리은행 회계법인에 대한 현장조사에 착수했다. 금감원은 지난달 29일 정 원장 주재로 우리은행 횡령사건 관련 회의를 열고 이 은행 외부 감사를 맡은 안진회계법인에 대한 감리를 결정했다. 우리은행은 횡령사건이 발생한 기간인 2012년부터 줄곧 안진회계법인이 외부감사를 맡았다. 2020년부터는 삼일회계법인으로 외부 감사 주체가 바뀌었다. 안진회계법인은 내부에서 횡령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우리은행에 대한 감사의견을 ‘적정’으로 제시했고. 내부회계관리제도에 대해서도 ‘합격점’을 줬다.

전문위원(전 서울신문 선임기자·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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