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던’ LG생활건강과 아모레퍼시픽 등 국내 화장품이 중국 시장에서 죽을 쑤고 있다. 중국 ‘6·18 쇼핑축제’에서 로레알 등 해외 브랜드와 포라이야(珀萊雅·PROYA) 등 중국 현지 브랜드의 공세에 밀려 매출액 상위 40위권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이다. 국내 화장품 업체들의 상반기 대목으로 불리는 ‘6·18 쇼핑축제’는 중국 2위 e커머스업체인 징둥(京東·JD)닷컴이 알리바바그룹의 광군제(光棍節·11월11일)를 본떠 만든 할인 행사다.

27일 중국 e커머스 리서치기관 이방둥리(億邦動力·ebrun)에 따르면 올해 6·18 행사의 스킨케어(기초 화장품) 판매(5월 26일~6월 20일) 톱10 브랜드 순위에 국내 화장품 업체는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사전행사(5월 26일~6월 3일)에서도 톱10에 들지 못하더니 결국 본 행사에서도 그 흐름을 바꾸는데 실패했다. 특히 알리바바그룹 산하 e커머스 플랫폼 톈마오(天猫·T-mall)에 따르면 스킨케어 매출액 상위 40위권에 국내 화장품 업체는 단 한 곳도 포함되지 않았다. LG생활건강은 지난해 후(Whoo) 등 주요 제품을 중심으로 프랑스 로레알과 일본 SKⅡ 등에 이어 매출 6위를 차지했으나 올해는 40위권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그래픽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국내 화장품 업체들은 6·18 쇼핑행사 판매 실적을 공개하지 않았다. LG생활건강과 아모레퍼시픽 등 국내 화장품업체들은 통상적으로 6·18 축제가 종료되는 동시에 보도자료를 내고 그 성과를 홍보했지만, 올해는 ‘초라한 성적’ 탓인지 자료를 내지 않았다. 톈마오의 6·18 축제 화장품별 판매보고서에 따르면 LG생활건강의 후 세트는 매출이 1048만 달러(약 135억8000만원)를 기록했고,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 세트 매출은 449만 달러로 집계됐다. 설화수의 경우 2020년 사전예약 판매에서만 120억원어치를 판매한 것과 비교하면 불과 2년 만에 매출이 급감했다. 화장품업계의 한 관계자는 “LG생활건강과 아모레퍼시픽의 경우 톈마오 플래그십스토어(대형 단독매장) 매출이 지난해와 비교해 50~60% 감소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번 6·18 쇼핑축제에서는 해외 프리미엄 브랜드가 여전히 강세를 보였다. 톱3는 프랑스 로레알과 미국 에스티로더, 프랑스 랑콤이 차지해 지난해와 동일하고, 독일 올레이와 프랑스 라메르가 빅5에 들었다. 이 덕분에 이들 업체와 일본 시세이도 등은 빠르게 매출을 회복했다. 로레알은 톈마오에서만 1억5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집계됐다.

중국 현지 브랜드 역시 약진했다. 지난해 쇼핑행사에서 톱10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포라이야와 웨이뤄나(薇諾娜·WINONA) 등 중국 브랜드가 처음으로 각각 6위와 10위에 진입했다. 지난해 8위를 차지했던 LG생활건강의 후는 명단에서 사라졌다. 이 같은 결과는 예견된 일이었다. 5월 말부터 진행된 6·18 축제 사전행사에서 성과가 부진했던 탓이다. 중국 디지털 소매데이터 업체 닌트(Nint)에 따르면 사전판매 첫날 4시간 동안 톈마오에선 가전과 미용, 스킨케어 등이 높은 실적을 거뒀다. 스킨케어의 경우 에스티로더와 로레알, 랑콤 순으로 매출이 좋았고 중국 브랜드 2개가 10위권에 들었다.

지난해 6위를 차지한 LG생활건강의 후는 올해 사전판매 행사에서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안지영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2016년 7월 ‘한류’에 힘입어 중국 시장에서 호황을 누릴 당시 LG생활건강과 아모레퍼시픽은 K뷰티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며 “최근 애국소비운동인 ‘궈차오(國潮)열풍’ 등으로 중국의 젊은이들이 화시쯔(花西子)와 같은 중국 화장품을 더 선호한다”고 말했다. 국내 화장품의 브랜드 파워가 중국 시장에서 급속히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LG생활건강의 후 브랜드 제품. [사진 = LG생활건강 제공/연합뉴스]
LG생활건강의 후 브랜드 제품. [사진 = LG생활건강 제공/연합뉴스]

이에 따라 지난해 국내 화장품의 중국 수출 실적은 44.5%나 감소했다. 수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에서 고전이 예상되면서 올해 화장품 수출 규모는 3.8% 증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2018년만 해도 아모레퍼시픽 이니스프리의 중국시장 점유율은 1.8%였지만 지난해에는 0.8%로 곤두박질쳤다. 라네즈와 마몽드 역시 2016년 각각 0.9%, 0.3%에서 지난해 0.6%, 0.1%로 떨어졌다. LG생활건강의 숨도 2019년 0.5%에서 지난해 0.3%로 주저앉았다.

이 틈을 중국 브랜드들이 채우고 있다. 포라이야는 2017년 1.3%에서 지난해 1.9%까지 점유율을 끌어올렸다. 포라이야는 프리미엄보다는 대중적인 제품을 중심으로 온라인 매출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브랜드다. 포라이야의 온라인 매출 비중은 2019년 53%에서 지난해 85%까지 높아졌다. 웨이뤄나는 2016년 0.4%에서 지난해 1.8%까지 치솟았고, HFP(HomeFacial Pro)도 2016년 0.2%에서 2019년 1.1%로 껑충 뛰었다. 중국 브랜드의 선전은 품질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중국 브랜드가 속속 등장하고 있는 데다 중국 정부의 정책기조가 자국 브랜드를 육성에 맞춰진 까닭이다.

여기에다 중국의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사이에서 애국소비인 ‘궈차오(國潮) 열풍’이 불면서 중국 화장품이 약진하고 브랜드 파워가 해외 프리미엄 브랜드보다 약한 한국산 화장품이 외면받고 있는 것이다. 화장품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 화장품 브랜드가 한국 화장품을 빠르게 카피해 이제 성능에 차이가 없는 수준”이라며 “이 때문에 브랜드 힘이 있는 유럽과 일본 화장품 브랜드만 살아남았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한국 화장품 업체들이 혁신 제품 연구·개발(R&D)에 매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를 통해 차별화된 제품력을 보유하고자 했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예컨대 ‘갈색병 세럼’으로 불리는 에스티로더 어드밴스드 나이트리페어는 1982년 출시한 최초 세럼으로 효능을 인정받아 현재까지 톈마오에서 판매 상위랭킹을 점하고 있는 인기 제품이다. 화장품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 화장품 업체들은 연구·개발(R&D)보다는 유통 확보와 마케팅 등을 통해 성장해왔다”며 “최근 중국에서는 혁신과 기술력에 대한 소비자 요구가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전문위원(전 서울신문 선임기자·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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