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시장에서 은행채와 국채, 특수채(공공부문이 발행한 채권) 등 이른바 ‘초우량채’가 자금을 싹쓸이하고 있다. 한국은행의 금리인상에 따른 투자심리 위축이 주요인이지만 한전과 시중은행이 시중 유동성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로 변한 탓도 컸다.

25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이달 들어 지난 20일까지 채권 순발행액은 국채 6조7174억원, 특수채 1조6325억원, 은행채 1조900억원 순이다. 순발행액은 채권 발행액에서 기존 채권의 만기상환액을 뺀 수치다. 해당 액수만큼 시장 유동성을 흡수했다는 뜻이다. 반면 이달 들어 카드·캐피털 등 여신전문금융사(여전사)가 발행하는 기타금융채와 회사채는 2조4473억원, 3조3214억원이 순유출돼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여전사와 일반 기업으로 갔던 5조7687억원이 빠져나와 초우량채로 이동했다는 얘기다.

특히 신용등급 AAA급인 한국전력이 발행하는 한전채가 시중 자금을 쓸어 담고 있다. 대규모 적자로 자금난에 처한 한전이 올 들어 한전채를 대규모 발행하면서 일반 기업이 발행하는 회사채를 ‘구축(驅逐)’하고 있다. 금리 인상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일반 기업들의 자금 조달을 더더욱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그래픽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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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탁결제원,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한전은 지난 17일 연 5.9% 3년 만기 회사채 1000억원 규모와 연 5.75% 2년 만기 회사채 1800억원어치를 발행하는 등 올 들어 23조1800억원 규모의 한전채를 발행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많다. 2020년 3조4200억원, 2021년 10조3200억원 대비 최고 6.7배 급증했다.

더욱이 한전채는 하반기 들어 발행금리를 계속 끌어올리고 있다. 6월 연 4%대, 9월 연 5%대를 넘은데 이어 조만간 연 6%대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장기물에 대한 기관투자가의 투자심리 위축으로 5년 만기 한전채 유찰이 반복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만기가 짧은 2·3년물을 통해서만 목표 물량을 채울 수밖에 없다 보니 발행금리를 계속 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은행들도 하반기 들어 ‘돈 먹는 하마’로 변했다. 은행채 순발행액(발행액-상환액)의 경우 1·2분기(-6160억원)에는 발행보다 상환이 많았지만, 지난 7월부터 이달 19일까지 17조180억원 순발행을 기록했다. 이달 들어서는 무려 15조2000억원 규모가 발행돼 전체 채권 발행액의 41.1%를 차지했다. 은행채 발행이 늘어난 것은 급증하는 기업대출 수요 등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시중은행이 은행채를 쏟아내며 다른 금융회사의 자금 조달을 막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신용도가 떨어지는 일반 기업뿐 아니라 신용도가 양호한 곳까지 금리가 오르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채권발행 시장이 급랭하고 있다. 최고 신용등급인 한전은 17일 연 5.75%와 연 5.9% 금리를 제시하고 모두 4000억원 규모의 채권(2~3년물)을 발행할 계획이었지만, 이중 1200억원 규모는 투자자를 찾지 못해 유찰됐다. 막대한 적자와 에너지 원가 상승으로 자금조달이 급한 한전은 상대적으로 신용등급이 낮은 AA-급 회사채보다 더 많은 이자 지급을 약속했지만 지난달부터 유찰이 잦아지는 등 투자자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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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신용등급(AAA)을 보유한 한국도로공사 역시 이날 1000억원 규모의 채권(2년물) 발행을 시도했으나 아예 투자자를 찾지 못해 전액 유찰됐다. 국가철도공단과 인천교통공사는 지난 18일 각각 1000억원(2년물), 300억원(5년물) 발행을 위해 입찰에 나섰지만 유찰됐다. 과천도시공사도 지방자치단체 산하 AA등급의 우량 공기업이지만 지난 19일 6.2% 금리에 발행하려던 600억원 규모의 채권이 전액 유찰됐다. 불과 6일 전 제시한 금리(5.421%)보다 0.75%포인트 이상 높은 금리를 제시했지만 채권시장 분위기는 싸늘했다.

이 때문에 회사채에 대한 투자심리가 빠르게 얼어붙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회사채(AA-, 3년물)와 국채 간 금리 차(스프레드)는 지난 14일 1.14%포인트까지 벌어졌다. 2012~2021년 중 장기 평균(0.43%포인트)을 크게 웃돌고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9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회사채와 국채 간의 금리 차가 벌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회사채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하기가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초우량채가 쏟아지면서 일반 회사채는 신용도가 좋아도 수요가 미달하는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AA+급 우량 신용도를 갖춘 JB금융지주는 지난 16일 1000억원 규모 공모채 수요예측에 나섰지만 380억원의 주문액을 받는 데 그쳤다. 비우량채는 상황이 더욱 어렵다. 롯데하이마트 등 일부 기업은 당초 예정한 공모채 발행 일정을 내년 초로 연기했다.

신용등급이 모두 AA등급 이하인 여전사채도 초우량채 물량 부담으로 수요가 줄고 있다. 연 5.9% 한전채가 쏟아진 지난 17일부터 20일까지 3일간 여전채 발행액은 900억원에 그친 반면 상환액은 3970억원에 달했다. 농협캐피탈(AA-)은 농협중앙회와 농협금융지주의 신용보장을 받는 데도 지난 20일 2년 만기 300억원 규모를 연 6.64%에 발행했다. 삼성카드는 지난 18일 2년 만기를 연 5.61%로 발행하면서 100억원을 모으는데 그쳤다.

한 증권사 회사채 발행 관계자는 “한전채뿐만 아니라 산업은행이 발행하는 산업금융채 등의 금리가 줄줄이 오르면서 개인 자산가들도 회사채 투자를 외면하고 있다”며 “강원도 지급보증 미이행으로 촉발된 레고랜드 사태로 단기자금 시장까지 마르면서 기업들의 ‘돈맥경화’가 심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원도는 지난 21일 레고랜드와 관련한 채무 2050억원을 예산 편성을 통해 늦어도 내년 1월까지 상환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마당에 정부는 한전에 채권발행 여력을 더 늘려주겠다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1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전 적자와 관련해 “일단 한전에 자금이 조달돼야 하기 때문에 한전채 발행한도를 높이는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며 “한도를 지금보다는 높여야 자금융통을 하면서 경영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전문위원(전 서울신문 선임기자·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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