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매수 대기자금으로 불리는 투자자 예탁금의 하루 50조원대가 맥없이 무너졌다. 시중금리가 치솟으면서 주식투자 매력이 크게 떨어진 게 악재로 작용했다. 지난해부터 약세장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개인투자자들이 증시에서 빠져나가는 대신 예·적금이나 채권 등 안전자산으로 갈아타고 있는 것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1일부터 27일까지 투자자 예탁금 평균액은 49조7178억원으로 집계됐다. 10월 말부터 투자자 예탁금은 48조원 안팎을 기록하고 있었던 까닭에 지난 10월 예탁금 평균액은 50조원을 밑돌았을 것으로 보인다. 투자자 예탁금은 투자자가 주식을 사려고 증권사 계좌에 맡겨두거나 주식을 팔고서 찾지 않은 돈이다. 주식매수를 준비하는 대기성 자금이기에 증권투자 열기를 나타내는 지표로도 통한다. 월평균 투자자 예탁금이 50조원 이하를 기록한 것은 2020년 7월 46조5090억원 이후 2년 3개월 만이다. 지난해 8월 69조4157억원으로 70조원을 넘보던 것과 비교하면 1년 2개월 만에 19조6979억원(28.4%)이나 쪼그라든 것이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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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 예탁금은 이른바 ‘동학개미’ 운동이 본격화하기 전인 2020년 1~2월만 하더라도 28조∼29조원에 불과했다.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가 떨어지고 저금리시대로 진입하며 증권시장이 강세장을 보이자 수많은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이에 힘입어 투자자 예탁금은 증가했고 기업공개(IPO, 증시 상장) 열풍까지 가세하면서 2020년 6월 26일 처음으로 50조원을 돌파했다. 월평균액 기준으로는 2020년 8월 처음으로 50조원을 넘어섰고 그해 12월엔 60조원도 돌파했다.

코스피지수가 3200선이었던 지난해 8월 69조4157억원으로 최고점을 찍었으나 이후 긴축이 시작되며 하락장이 본격화하자 올 5월 50조원대로 떨어졌다. 지난달 유가증권시장에서 개인의 하루 평균 거래대금(매수대금과 매도대금의 평균)은 4조9114억원가량이었다. 코스피지수가 처음으로 3000을 돌파한 지난해 1월(17조2994억원)과 비교하면 70%가량 급감했다. 한국거래소의 한 관계자는 “한국 증시에서 개인투자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60% 정도”라며 “투자자 예탁금 감소는 그만큼 주식시장을 떠나는 개인투자자가 증가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시장을 떠나는 것은 치솟은 금리 탓이다. 최근 은행권에서는 하루만 맡겨도 이자를 받을 수 있는 ‘파킹통장’ 금리가 연 3.8%인 상품까지 등장했다. 정기예금 금리는 연 5~6%로 치솟았다. 지난 8월 정기 예·적금 규모는 전달보다 32조1000억원 급증하며 2001년 12월 이후 최대폭으로 증가했다. 반면 대부분 증권사의 예탁금 이자는 0%대다. 국내 증권사 가운데 100만원 이상 예탁금을 맡길 경우 1%대 이자를 주는 곳은 KB증권과 토스증권 두 곳뿐이다.

지난해 6월부터 하락장이 지속되는 데다 주요 기업실적이 기대에 못 미친 것도 개인투자자들을 지치게 한 요인이다.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삼성전자가 발표한 3분기 영업이익(10조8000억원)은 시장의 예상보다 1조원이나 적었고, 경기에 민감한 국내 상장사의 3분기 실적 추정치는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역실적 장세(기업실적 하락으로 인한 증시 하락)가 나타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는 분위기다. 정명지 삼성증권 투자정보팀장은 “상승장이 온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증시를 이탈하는 투자금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한화투자증권은 현재 속도라면 내년 상반기까지 투자자 예탁금이 30조원 안팎으로 감소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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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에서 손을 떼는 개인투자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주식을 거래하는 증권사 주식거래 어플리케이션(앱) 이용자수가 감소하고 있다. 보유했던 주식을 팔아버리고 증권투자를 잠시 쉬거나 아예 증시를 떠나는 투자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얘기다.

앱 정보업체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지난 9월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기준 국내 주식거래 점유율 상위 5개 앱(키움·KB·삼성·미래에셋·NH투자증권)의 이용자는 모두 778만명으로 집계됐다. 8월(823만명)보다 45만명이나 감소했다. 이용자는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앱을 쓴 사람을 뜻한다.

물론 주가가 떨어진다고 주식 앱 사용자가 반드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지난 6월에는 하락 폭(-13.2%)이 더 컸지만 5개 앱 사용자 수는 5월보다 오히려 10만명이나 늘어났다. 시장 전문가들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3차례 자이언트스텝(금리 0.75%포인트 인상)으로 ‘킹(king)달러’가 등장하면서 2년 2개월 만에 코스피 2200선이 무너진 ‘9월장’이 ‘6월장’보다 체감 충격이 더 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미 연준이 지난 6월에 이어 7월과 9월에도 ‘자이언트 스텝’을 밟으면서 달러화 대비 원화가치가 24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주식시장이 맥을 추지 못하는 바람에 개인투자자들의 좌절이 커졌다는 것이다. 이경민 대신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코로나19 특수’ 이전으로 증시가 회귀하면서 개미들의 낙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식시장을 떠난 개인투자자의 돈은 은행 예·적금이나 채권 쪽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특히 가파른 금리 인상으로 채권 수익률도 상승하면서 안전성과 수익성 모두 매력도가 높은 채권에 개인투자자 자금이 급격히 몰리고 있다. 금투협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지난달 28일까지 개인은 장외 채권시장에서 채권을 16조6503억원어치 순매수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4조 4075억원의 4배에 이르는 규모다.

채권은 개인투자자들에게 생소한 상품이지만 주식시장 부진에 인기를 누리고 있다. KB증권에 따르면 올해 당사에서 채권을 매수한 고객 중 63.5%가 기존 채권 경험이 없거나 올해 처음으로 계좌를 개설한 신규 고객인 것으로 집계됐다. 주식과 달리 장외 채권은 증권사마다 보유하는 종목이 다르고 같은 채권의 경우라도 판매하는 가격도 상이해 증권사 간 경쟁이 치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주식 하락장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고객과 증권사가 모두 채권에 열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전문위원(전 서울신문 선임기자·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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