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의 추세적 흐름을 나타내는 근원물가가 올해 10월까지 21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올랐다. 올 들어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물가가 일단 정점을 찍었지만, 불이 붙은 물가는 내년에도 쉽사리 내려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9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근원물가 지표인 ‘식료품 및 에너지 제외지수’는 지난달 106.09(2020년=100)로 지난해 누계 대비 3.5% 상승했다. 10월 누계 기준으로 2001년(3.6%) 이후 21년 만의 최대 상승폭이다. 근원물가는 기후·전쟁 같은 일시적 충격에 따라 가격 등락폭이 큰 항목을 제외하고 산출해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준다. 전세계 물가상승을 부추긴 원유·곡물 등 원자재가격 상승세를 빼더라도 우리 경제 전반의 물가흐름이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뜻이다.

근원물가는 10월 월간 기준으로도 지난해 같은 달보다 4.2% 올라 2008년 12월(4.5%) 이후 14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상승했다. 월간 지수 상승률은 지난 8월 4.0%로 올라선 뒤 9월 4.1%, 10월 4.2%로 오름폭을 키웠다. 올해 남은 기간 이대로 오름세가 이어진다면 연간 지수상승률은 3%대 중반을 넘어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4.8%)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치솟을 가능성도 있다. 이 같은 흐름은 물가상승 요인이 공급측면에서 수요측면으로 이동한다는 의미다. 국제유가 급등이나 농축수산물 가격 상승 등 외부 공급요인을 제외하고도 물가가 큰 폭으로 오르면서 상승추세를 이어간다는 얘기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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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최근에는 가격이 한 번 오르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외식 등 개인서비스 가격이 높은 오름세를 이어가며 물가하락을 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동안 물가를 끌어올린 국제 원자재 가격이 안정되더라도 당분간 고물가가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천소라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 총괄은 “(수치상) 물가의 꼭대기 지점은 7월이었지만, 서비스물가처럼 하방경직성이 커서 한 번 올라가면 내려가지 않는 품목들이 있는 만큼 향후 물가가 떨어지더라도 속도는 천천히 갈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올해의 월별 소비자물가는 6.3%(7월)로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뒤 오름폭을 다소 줄였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5%대 중후반의 높은 상승률을 이어갔다. 이 기간 전체 물가상승률 가운데 개인서비스 기여도는 7월 1.85%포인트에서 10월 1.97%포인트로 확대됐다.

정부와 한국은행 역시 물가가 정점을 지난 후에도 당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10월 소비자물가 동향 발표 이후 “앞으로 물가 상승세는 점차 둔화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상당 기간 높은 수준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한은도 내년 1분기까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대를 이어갈 것으로 내다봤으며, 수요 측 물가압력을 반영하는 개인서비스 물가는 당분간 6%대 오름세를 나타낼 것으로 예상했다. 높은 물가는 결국 금리인상으로 이어지며 경기침체를 가속화시키게 된다. 물가상승으로 가계의 실질구매력이 떨어진 가운데 대출금리 부담까지 커지면서 올해 우리 경제를 떠받쳐온 소비에 타격을 주게 된다.

이런 가운데 10월 소비자물가는 5.7% 상승했다. 올여름 이후 둔화했던 물가상승률이 석 달 만에 다시 확대됐다. 고환율과 수출부진에 고물가까지 더해져 우리 경제와 서민부담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통계청이 지난 2일 내놓은 ‘10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09.21(2020년=100)로 전년 동기보다 5.7% 올랐다. 올해 물가상승률은 6월 6%대(6.0%)를 기록했고 7월 6.3%를 찍은 뒤 8월에 5.7%, 9월 5.6%로 상승폭을 줄여왔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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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세는 공공요금 인상이 이끌었다. 지난달 전기·가스·수도 요금은 전년 동기보다 무려 23.1% 상승했다. 전달(14.6%)보다 10%포인트 가까이 상승한 수치다.

특히 소비자물가는 한국전력이 전기요금을 올린 4월과 7월, 10월 전달보다 오름폭을 확대했다. 10월엔 가장 큰 폭인 7.4원 인상 이후 공공요금이 물가상승을 이끈 주요인으로 꼽혔다. 전체 물가에서 전기·가스·수도가 차지하는 기여도가 9월 0.48%포인트에서 10월 0.77%포인트로 2배가량 올랐기 때문이다. 전기·가스·수도 지수도 전기요금 인상이 있던 4월(6.8%)에 전달보다 3.9%포인트 상승했고, 7월(15.7%)에는 전달보다 6.1%포인트, 10월(23.1%)에는 전달보다 8.5%포인트 오름세를 기록했다. 10월 오름폭이 확대되면서 관련통계를 집계한 2010년 1월 이후 가장 큰 폭의 상승률을 보였다. 전기요금 정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내년 1월에는 전기·가스·수도 물가 상승폭이 10%포인트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전기요금이 오를 때마다 물가도 함께 상승하는 가운데 내년에도 요금 인상이 이어지면 물가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전이 요금 인상을 검토하는 것은 연료비 급등으로 사상 최악의 실적을 낸 탓이다. 증권가는 올해 한전 연간 적자 규모가 30조원을 넘어서고 40조원에 달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한전은 올 들어서만 20조원이 넘는 공사채(한전채)를 발행하면서 빚으로 버텨오고 있다. 한전이 발전사에서 전기를 사 오는 기준가격이 되는 전력도매가격(SMP)이 연일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적자폭도 확대됐다. 겨울철 난방수요가 늘어나면 적자 폭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금융 전문가들은 채권시장에서 한전채 발행 폭증으로 일반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지고 전반적인 시중금리가 오르는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한다. 한전의 적자 폭을 줄이기 위해 요금 인상이 불가피하지만, 전기요금을 올릴 경우 물가가 출렁일 수 있는 까닭에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전 적자가 커지고 채권시장이 불안해지며 더 이상 한전채를 발행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며 “공공요금을 인상하면 근원물가도 함께 올라가고 소비자물가지수도 덩달아 상승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만큼 전기요금 인상이 물가상승률의 상방압력으로 상당 기간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위원(전 서울신문 선임기자·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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