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행이 위기를 맞고 있다. 은행의 공격적 예금금리 인상으로 예금이 은행으로 옮겨가고 있는데다 본격 시행되는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에 따라 퇴직연금마저 대거 이탈할 공산이 커졌기 때문이다.

23일 저축은행중앙회에 따르면 지난 17일 기준 국내 79개 저축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 평균 금리는 연 5.5%다. 지난달 초만 해도 연 3% 후반대이던 저축은행 예금금리는 한 달여 만에 1.5%포인트 이상 치솟으며 연 5%대 중반으로 뛰어올랐다. 직전 1년간 금리 상승폭(1.59%포인트)과 맞먹는다.

금융감독원 금융상품통합비교공시에 따르면 15일 기준 KB국민·하나은행은 각각 연 5.01%, 5.00%의 정기예금을 취급하고 있다. 저축은행과 은행 간의 예금금리 차가 0.5%포인트에 불과해 은행의 예금금리가 저축은행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것이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은행 정기 예·적금이 30조원을 흡수하는 동안 저축은행은 1조원을 조달하는 데 그치는 등 저축은행의 자금조달난이 가중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9월 은행의 정기 예·적금 잔액은 전달보다 30조5000억원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저축은행의 수신 잔액은 118조6822억원으로 전달보다 1조2118억원 불어나는 데 그쳤다.

서영수 키움증권 연구원은 “은행의 공격적 금리 인상은 비은행의 유동성 위험을 높이고 대출금리 인상을 촉발할 것”이라며 “지금 추세대로면 2년 내 대출이자 부담이 두 배로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때문에 금융당국이 금융권에 예금금리 인상 경쟁을 자제하라고 당부했지만 저축은행은 더 높은 금리를 쫓는 ‘금리 노마드족’을 붙잡기 위해선 수신금리를 올리는 게 불가피한 상황에 놓였다.

저축은행은 통상 은행에 비해 높은 예·적금 금리를 주며 소비자 유치경쟁을 벌여왔다. 저축은행은 2금융권에 속해 있는 만큼 위험부담이 큰 대신 은행보다 더 높은 대출금리를 적용하는 까닭에 예·적금 금리도 은행보다 높여 소비자들을 유치해 온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기조에 맞춰 은행이 공격적으로 예·적금 금리를 올리고 있는 반면 저축은행은 예금금리를 더 높일 수 있는 여력이 바닥난 상태다. 금융당국이 정한 대출금리 상한선이 20%로 맞춰져 있는 데다 새희망자금 지원 등으로 대출금리가 묶여 있기 때문에 예·적금 금리를 올릴 경우 수익성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은행의 경우 자금조달 방법과 수익구조가 저축은행보다 다양하다. 저축은행들이 대출에 필요한 자금을 주로 예·적금 상품판매를 통해 조달하는 반면 은행은 은행채 발행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자금을 끌어모은다. 이 덕분에 은행은 저축은행에 비해 예·적금 금리를 올리는데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

이에 저축은행업계는 은행과의 예·적금 금리 경쟁에서 계속 뒤처질 경우 소비자 자금 이탈이 가속화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시중은행보다 부도 위험이 높은 저축은행의 상품에 가입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더 높은 금리를 받으려는 목적 때문인데, 금리마저 낮다면 누가 저축은행을 찾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소비자를 붙잡기 위해 수익 감소를 무릅쓰고 ‘울며 겨자 먹기’로 저축은행 역시 더욱 공격적으로 예·적금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그래픽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예·적금 금리를 올리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금리 인상과 부동산경기 악화로 브리지론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부동산금융 부실위험이 높아지면서 지방의 소형 저축은행을 중심으로 자산 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커진 탓이다. 수신금리를 파격적으로 올렸다가 오히려 ‘자금사정이 급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예금 특판 때 신규 자금이 100원 들어온다고 하면 기존 자금은 30원가량 빠져나간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금융당국이 은행권에 과도한 수신금리 인상을 자제하라고 당부하면서 2금융권 유동성 문제가 일부 해소될 것인지 주목된다. 금융위원회는 14일 신진창 금융산업국장 주재로 은행권 금융시장 점검 회의를 열고 “은행권으로의 시중 자금 쏠림 현상이 제2금융권의 유동성 부족을 초래할 수 있는 만큼 과도한 자금조달 경쟁에 나서지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금융위는 앞서 저축은행 예대율 규제 비율도 100%에서 110%로 완화했다.

그렇지만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과 시중은행의 예금금리가 계속 오르는 이상 저축은행 업계에선 연 7%대 정기예금 출시도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오는 24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올리면 은행은 금리 인상분을 예금금리에 반영할 것으로 보인다.

예금금리 인상은 소비자에게는 희소식이지만 조달금리 상승으로 저신용자 대출축소가 불가피하다는 부작용이 있다. 저축은행중앙회에 따르면 저축은행들의 3분기 민간 중금리대출(사잇돌 대출 제외) 공급실적은 3조1261억원이었는데, 전 분기보다 5.7%(1811억원) 감소했다.

특히 큰손인 법인·기관들이 이자를 조금 덜 줘도 안전한 은행을 선호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 저축은행에는 악재다.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최근 기업과 기관 고객이 금리를 보고 저축은행에 예치했던 자금을 은행으로 옮기는 사례가 늘어났다”며 “기업 예금은 고객당 규모가 보통 수십억원 단위인 만큼 빠져나갔을 때 타격도 크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저축은행 예금자 가운데 법인·기관 비중은 36%에 이른다.

저축은행의 퇴직연금도 대거 빠져나갈 공산이 크다. 이달 확정된 퇴직연금 디폴트옵션 상품에서 저축은행 예금이 제외된 탓이다. 디폴트옵션은 퇴직연금 가입자가 별도로 운용 지시를 하지 않아도 사전에 정한 상품으로 돈을 굴리도록 한 제도다. 6월 말 기준 주요 저축은행의 예수금에서 퇴직연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40%에 이른다. 지금까지는 저축은행 예금에 들어간 퇴직연금은 만기가 돼도 가입자가 따로 정하지 않으면 같은 상품에 자동으로 재예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앞으로는 다른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바꿔 탈 공산이 크다. 저축은행으로선 예금이탈 부담이 커지는 것이다.

전문위원(전 서울신문 선임기자·베이징특파원)

저작권자 © 나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